힘들게 가진 아이인데.. 기쁨보다 우울감이 커요 (진주 30대 중반/여 우울증)
안녕하세요. 결혼 5년 만에, 그리고 3번의 시험관 시술 끝에 드디어 임신에 성공한 예비 엄마입니다.
남편도 시댁도 친정도 모두 경사 났다고 기뻐하시고, 저 역시 임신 테스트기에 두 줄이 떴을 때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임신 중기에 접어드니 제 마음이 제 마음 같지가 않습니다. 입덧이 심해서 몸이 힘들어진 탓도 있겠지만, 하루 종일 이유 없이 눈물이 나고 땅이 꺼질 듯한 무기력감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아기 용품을 보러 가도 전혀 설레지가 않고, '내가 과연 좋은 엄마가 될 수 있을까', '내 인생은 이제 끝난 건가' 하는 부정적인 생각만 꼬리에 꼬리를 뭅니다. 남편이 옆에서 맛있는 걸 사다 주고 기분을 풀어주려 노력해도 다 귀찮고 짜증만 납니다. 그토록 원하던 아기인데 기뻐하지 못하는 제 자신이 너무 한심하고, 뱃속의 아기한테 나쁜 영향을 줄까 봐 죄책감에 시달리다가 밤새 펑펑 울기도 합니다. 주변에서는 호르몬 때문이라고, 배부른 소리 하지 말라고 하는데 저는 정말 하루하루가 지옥 같습니다.
임신 중이라 함부로 약을 먹을 수도 없고 정신과에 가기도 겁이 납니다. 저 같은 경우도 치료가 필요한 우울증일까요? 한의원에서는 태아에게 해가 가지 않게 치료할 방법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닥톡-네이버 지식iN 상담한의사 김한나입니다.
그토록 기다리던 소중한 생명이 찾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찾아온 손님인 우울감 때문에 홀로 힘겨운 싸움을 하고 계신 산모님께 깊은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난임 기간 동안 겪으셨을 마음고생과 시술 과정에서의 신체적 고통을 생각하면 지금은 마냥 행복하기만 해도 모자랄 시간인데, 오히려 가라앉는 기분과 죄책감에 시달리고 계시니 그 안타까움이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산모님, 지금 느끼시는 감정은 산모님이 모성애가 부족해서거나 배부른 투정을 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많은 분들이 산후우울증만 알고 계시지만, 임신 중 겪는 산전 우울증 또한 전체 임산부의 10퍼센트에서 20퍼센트가 겪을 정도로 흔하고 치료가 필요한 질환입니다. 현재 산모님께서 호소하시는 지속적인 우울감, 무기력증, 짜증, 그리고 죄책감 등은 호르몬의 급격한 변화와 신체적, 심리적 부담감이 맞물려 나타나는 전형적인 임신 우울증 증상이므로 너무 자책하지 마시고 전문가의 도움을 받으셔야 합니다.
임신 우울증은 임신으로 인해 뇌의 신경전달물질 체계가 일시적으로 불안정해지면서 발생합니다. 임신 초기에는 에스트로겐과 프로게스테론 수치가 급격히 상승하고, 입덧으로 인한 영양 불균형, 변해가는 체형에 대한 스트레스, 그리고 출산과 육아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뇌를 우울하게 만듭니다. 특히 산모님처럼 어렵게 임신하신 경우, 아이를 잘 지켜야 한다는 강박관념과 좋은 엄마가 되어야 한다는 부담감이 일반 산모보다 훨씬 크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우울증에 더 취약할 수 있습니다. 우울증이 지속되면 코르티솔이라는 스트레스 호르몬이 분비되어 태반을 통해 태아에게 전달될 수 있고, 이는 태아의 성장 발달이나 정서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으므로 엄마와 아기 모두를 위해 적극적인 관리가 필요합니다.
한의학에서는 임신 중 우울증의 원인을 기혈 부족과 기의 울체로 설명합니다. 한 생명을 품고 길러낸다는 것은 산모의 모든 에너지를 태아에게 쏟아붓는 과정입니다. 평소 체력이 약하거나 난임 시술 등으로 기혈이 많이 소모된 상태에서 임신하게 되면, 태아에게 영양분을 보내느라 정작 산모의 뇌와 심장으로 갈 기혈이 부족해집니다. 이를 기혈양허라고 하는데, 이로 인해 머리가 멍하고 무기력하며 이유 없는 슬픔을 느끼게 됩니다. 또한 임신으로 인해 기의 흐름이 막히는 기기울체 현상이 발생하면 가슴이 답답하고 짜증이 늘며 감정 기복이 심해집니다. 즉, 지금의 우울함은 마음의 문제가 아니라, 에너지가 고갈된 몸이 보내는 구조 신호인 것입니다.
한의원에서의 치료는 태아에게 안전한 것을 최우선으로 하여, 산모의 고갈된 기운을 채우고 막힌 흐름을 뚫어주는 데 집중합니다. 많은 분들이 임신 중에 한약을 먹어도 되는지 걱정하시지만, 한의학에는 안태약이라 하여 태아를 편안하게 하고 산모의 증상을 치료하는 안전한 처방들이 오래전부터 존재해 왔습니다. 전문 한의사의 정확한 진단 하에 처방되는 한약은 산모와 태아 모두에게 유익합니다.
치료의 핵심이 되는 한약은 산모님의 체질과 증상에 맞춰 처방됩니다. 기운이 없고 축 처지는 분들에게는 인삼, 황기, 백출 등의 약재를 사용하여 기력을 북돋아 주고, 태아를 튼튼하게 잡아주는 힘을 길러줍니다. 산모의 체력이 올라가면 자연스럽게 마음의 여유도 생기게 됩니다. 가슴이 답답하고 화가 나는 분들에게는 자소엽, 진피, 향부자 등 기운을 순환시키는 약재를 사용하여 뭉친 감정을 풀어줍니다(이기해울). 특히 자소엽과 진피는 입덧을 완화하고 소화를 도울 뿐만 아니라 우울한 기분을 전환시키는 데 탁월한 효과가 있어 임산부에게 자주 쓰이는 약재입니다. 또한 심장의 혈을 보충하는 대추, 용안육 등을 가미하여 불안한 마음을 안정시키고 숙면을 돕습니다.
약물 치료 외에도 임산부가 받을 수 있는 가벼운 침 치료는 기혈 순환을 도와 두통이나 어깨 결림 같은 신체적 통증을 줄여주고, 심리적 이완 효과를 주어 우울감 해소에 도움이 됩니다. 산모님, 지금은 억지로 기뻐하려고 애쓰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힘든 과정 끝에 엄마가 되어가는 중이니 잠시 지치고 힘든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한의학적인 도움을 통해 부족한 기운을 채우고 흐트러진 밸런스를 잡으신다면, 산모님은 곧 태동을 느끼며 아이와의 만남을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실 수 있습니다. 건강한 엄마가 되어 아이를 맞이하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편안한 마음으로 내원해 주십시오.